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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관련자료

재해발생 및 극복의 기록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과 재해 상황들, 그리고 재해 극복을 위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제공해 드립니다.
저희 재난안전대채본부는 항상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개요

우리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제작하였고 체계적인 기상 및 천재지변을 기록하였으며 우리 나라 고유의 역학(曆學)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40,000여회에 달하는 천재지변이 있었다.

재해는 군주(君主)의 부덕(不德)이나 실정(失政)의 소치(所致)로 여겨지고 나아가서는 왕조나 국운의 쇠퇴와도 관련이 이어지기까지 했던 당시의 실정(實情)으로 보아 기록의 사장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실제의 재해 발생회수는 기록상의 회수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통상 우리 나라의 재해문제는 수해(水害)와 한해(旱害)인데 한해는 그 피해가 광범위해서 전반적으로 흉년농사가 초래되고, 수해에는 지역에 따라 비록 극심한 피해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국지적이었으며, 풍해(風害)는 그 발생이 너무나 불규칙하였다.

이와 같은 재해들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있었으나 인지(認知)가 발달됨에 따라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커졌다. 고대로부터 주술(呪術)적 방법에 의한 것이나 수리관개(水利灌漑) 사업을 일으킨 것은 수해, 한해를 감소시키고 작물의 풍작을 가져와서 더 안정된 생활을 하려는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도전이요 노력이었다고 보여진다.

고대로부터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재해로 초여름(4∼6월)에 흔히 보는 한발재해, 여름철(6∼9월) 호우로 인한 홍수재해, 늦여름에서 초가을(8∼10월) 사이에 내습하는 태풍재해, 기타 재해라고 할 수 있는 지진재해, 해일재해, 병충해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나라는 비가 여름에 집중되고, 한번 비가 오면 호우가 쏟아지고, 비가 시작되는 시기도 일정하지 않으며, 해에 따라 변동도 심하다. 이와 같은 강수의 특색은 우리에게 홍수로 인한 수해와 가뭄으로 인한 한해를 가져온다. 또한 우리는 쌀 농사를 주축으로 한 농업이 국민생활의 기초가 되어왔다. 따라서 모를 내고 뿌리를 내리는 오뉴월에 충분한 강우가 없으면 식량뿐만 아니라 국민경제 전체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천재(天災)를 통치자의 부덕(不德)으로 믿었던 옛날에는 홍수나 가뭄은 곧 왕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현명한 통치자는 비를 내려주기를 하늘에 빌고 물을 모아 필요할 때 물을 공급하여 풍년이 들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삼국

삼국시대 이래 우리 나라에는 한해와 수해의 연속적인 내습으로 농업생산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왔다.

삼국시대는 수해가 있을 때는 대수(大水), 대우(大雨)로 기록하여 그 상황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대수, 대우, 또 수해를 일으킨 폭우 등을 보면 모두 40여 회에 달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통해 삼국시대의 가뭄과 굶주림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매우 심각한 일들이 있었다. 가뭄은 한(旱), 대한(大旱)으로 표시되어 있고, 그 시기도 명기되어 있어 계절을 알 수 있다. 한과 대한이 있었던 시기를 보면 여름 가뭄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은 봄부터 여름에 걸친 가뭄, 가을, 봄 가뭄이 다음으로 많았다. 봄에는 가뭄은 적었으나 춘하로 이어지는 가뭄이 많아 모든 것을 합치면 결국 봄과 여름 가뭄이 격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뭄의 정도는 그것에 뒤따르는 굶주림의 상태로 표현되어 있는데 가장 가벼운 가뭄은 한으로만 기술되어 있고, 큰가뭄은 대한으로 그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대한이 있으면 그것에 따르는 굶주림은 기(飢)와 기(饑)로 표시되어 있다. 그 가뭄과 굶주림의 상태를 보면 가장 가벼운 것은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으며, 심한 가뭄에는 나무껍질로 연명을 했다. 더 심한 기근에는 자식을 팔았고, 가장 극심했던 기근에는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기근의 원인은 물론 대부분이 한, 대한에 있었으나 대수로 인한 것, 상해(霜害), 설해(雪害), 황해(蝗害)로 인해 발생된 적도 있다.

강설(降雪)에 대해서는 가장 정확한 계측이 이미 삼국시대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적설량을 척(尺)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적설량의 최대는 일장(一丈)이고, 6척, 5척, 3척, 1척의 기록이 나와 있다.

또 강설은 설(雪)과 대설(大雪)로 나누어 구별했고, 특히 눈이 없었던 겨울은 무설(無雪)로 나타내고 있다. 겨울의 강설은 정상이지만 때로는 철이 이른 가을철의 설이나 대설, 철이 늦은 봄철이나 여름의 이상강설도 가끔 기록되어 있다.

바람은 풍(風), 대풍(大風), 폭풍(暴風)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바람의 강도는 나무가 부러졌다, 나무가 뽑혔다, 기와가 날아갔다, 건물이 무너졌다 등 여러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풍향에 대한 언급은 극히 드물다.

 

[삼국시대의 재해상황]

삼국시대의 재해상황
재해종별 기상재해 지진 황해 기근
한해 수해 풍해 상해 박해
삼 국 시 대 고구려 9 4 4 8 - 19 8 7 59
백제 22 6 4 2 2 16 5 15 72
신라 27 14 14 14 1 25 13 6 114
통일신라시대 21 5 9 6 4 37 9 17 108

 

고구려

민중왕 2년(45년) 5월에 국동지방(수도의 동쪽지방)에 대수가 지고 백성들이 기근에 빠지므로 창곡(倉穀)을 풀어 이를 구제하였다.

모본왕 2년(48년) 8월에 대홍수로 산이 20여 곳이나 붕괴되었다. 왕은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국내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태조왕 56년(108년) 봄에 큰 한재가 들어 여름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적지(赤地)가 되고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여 왕은 사자를 보내어 이를 구제하였다.

안원왕 5년(535년) 국남지방(평양 이남지방)에 대홍수로 200여명이 사망하였다.

 

백제

다루왕 28년(55년) 봄, 여름에 한재가 들어서 죄수를 살피고 사죄(死罪)를 사면(赦免) 하였다.

개루왕 40년(116년) 6월에 큰비가 10일 동안이나 내려서 한강의 물이 불어 넘치고 민가가 헐어졌으므로 7월에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수해를 입은 전지(田地)를 보수하게 하였다.

구수왕 9년(222년) 2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221년 5월에 큰물이 져서 파손된 제방을 수리케 하였다.

고이왕 15년(248년) 봄여름에 한재가 들고 기근이 심하므로 왕은 창고를 풀어 이를 진휼(賑恤) 하고 또 1년 동안의 세금을 감면시켰다.

무령왕 6년(506년) 봄에 병이 돌고 3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 천택 (川澤)이 모두 마르고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은 창곡을 풀어 이를 구제하였다.

 

신라

탈해이사금 19년(75년) 한재가 들어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므로 창곡을 풀어 이를 구제 하였다.

파사이사금 9년(108년) 5월에 큰물이 지고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므로 왕은 10도에 사자를 파견 하여곡창을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일성이사금 12년(145년) 봄여름에 한재가 들었는데 남쪽지방이 특히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은 곡식을 그 지방으로 옮겨 이를 구제하였다.

내해이사금 3년(198년) 5월에 국서(영서,호남)지방에 큰 홍수가 있었으므로 왕은 수해지역의 주, 현에는 1년 동안의 세금을 면제시키고 7월에는 사자를 그 지방으로 파견하여 위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내해이사금 31년(226년) 한재로 인하여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므로 왕은 창곡을 풀어 이를구제하고 10월에는 내외의 감옥 죄수를 다시 살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내물마립간 17년(372년) 봄, 여름에 큰 한재가 있었고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고 유랑인이 많이 발생하여 왕은 사자를 각지로 파견하여 창곡을 풀어 백성을 구제 하였다.

자비마립간 12년(468년) 4월에 국서지방에 큰 홍수가 져서 민가가 헐어지고 떠내려갔다.

7월에 왕은 수재가 있는 주·군을 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소지마립간 5년(483년) 4월에 큰물이 지고 7월에 또 홍수가 졌다. 10월에 왕은 일산에 순행하여 이재민을 위문하고 곡식을 내어 주었다.

소지마립간 14년(492년) 봄, 여름에 한재가 들었다. 이에 왕은 스스로 정사를 반성하고 아울러 먹는 음식을 평소보다 감하였다.

지증마립간 7년(506년) 봄,여름에 한해가 들어서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므로 왕은 창곡을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진평왕 11년(589년) 7월에 국서지방에 큰 홍수가 져서 민가 30,360호가 표몰되고 200여명이 죽어 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수재민을 구하였다.

성덕왕 6년(707년) 정월에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어 사람들에게 하루에 조곡 3말씩 7월까지지급하였다. 2월에 죄수를 대사면하고 백성들에게 5곡 종자를 주었다.

 

고려

고려는 서기 918년에 창건되어 서기 1392년에 멸망했으니 474년간을 이어져 왔다. 삼국시대의 재해실적이 주로 왕도(王都)를 중심으로 하여 기록에 남아 있듯이 고려시대도 왕도 중심의 재해내용이 대부분이나 삼국시대의 기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재해기록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해 오고 있다. 이것은 삼국시대보다도 고려시대에 이르러 재해극복을 위한 시책이 아주 강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책은 그후 조선시대에도 크나큰 교훈으로 이어졌다.

비록 재해실적의 내용이 훨씬 정량적(定量的)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못된다 하더라도 왕조를 중심으로 지방관사들의 주요 재해발생 보고체계를 유지하여 시행하여 왔음은 오늘날 우리들의 방재행정 체계에 참고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물난리가 극심했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대우가 85회, 대수가 19회로 도합 104회나 된다. 그러므로 고려조 474년간에 매 5년에 한 번 꼴의 대홍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도 현종 17년(1026년) 가을 장마는 민가 80여 호를 떠내려가게 하였으며, 정종 5년(1039년) 여름 장마에는 압록강 물이 넘쳐 병선(兵船)이 70여 척이나 표류했다. 또한 고종 12년(1225년) 여름 비는 2일 동안에 평지의 수심이 7∼8척(약 2m)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명피해가 가장 심했던 것은 명종 16년(1186년)으로 민가 100여 호가 떠내려갔고 사람이 1,000명이나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또 한발도 격심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象緯考) 한황(旱蝗)에서 가뭄을 추려 보더라도 상당수에 달한다. 가뭄이 심해 메뚜기의 극성으로 곡식에 많은 피해를 준 황(蝗)은 21회가 발생하였다. 또한 한(旱) 14회, 대한(大旱) 23회, 불우(不雨) 2회가 발생하였고, 굶주림인 기(饑)가 18회, 대기(大饑)가 12회에 달하고 있다. 여기서는 현상이 일어났던 연, 월과 장소 등이 명확하게 기록되어있다.

가뭄의 정도는 초목이 말랐다. 농작물이 고사하였다 등으로 기록했고, 이에 따르는 기근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같이 자식을 먹었는가 하면 서로 잡아먹었던 정도의 가뭄과 굶주림이 있었다. 또 기근에 온 가족이 죽은 일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심했던 기근은 공민왕 9년 4월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었던 기근이었다. 이때 기근으로 죽은 사람은 전 인구의 반이나 되었으며 죽어서 길에 버려진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기근의 상황을 물가와 비교하여 그 정도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예를 들면 인종 10년 7월에 경성에 기근이 들어 곡물이 귀하고 물자는 천하여 은병 1척 값이 쌀 5석이며, 소마 1필의 값이 1석이고, 송아지 1두의 값이 4두요, 포 1필의 값이 6승이었으며 길거리에는 굶어죽은 자가 잇달았다.

눈에 대해서는 눈의 깊이를 척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대설 또는 우설로 구분하였다. 가장 눈이 많이 왔던 것은 공민왕 12년(1363년) 2월의 대설로 그 깊이가 3척에 달하였다. 또 우박설로 동사자가 나온 일도 있었다.

가장 자세하게 관측된 것은 바람으로 대풍, 폭풍을 비롯하여 바람의 특성 및 풍향을 나타내는 여러 종류로 구분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풍, 대풍, 폭풍의 3종으로 구분한 것에 비해 고려시대에는 그 종류가 많이 증가하고 있다.

우선 풍계별로 보면 대풍, 폭풍이 대부분이고 태풍, 질풍(疾風), 열풍(烈風) 등이 1∼2회 정도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대풍과 폭풍의 상태는 바람의 강도에 따라 구별한 것 같지는 않다. 대풍과 폭풍의 정도를 표시한 표 1과 표 2를 비교할 때 양자 모두 비슷한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표 1] 대풍의 정도

대풍의 정도
대 풍 의 정 도 횟 수
큰 바람이 불었다 27
나무가 꺾어졌다 1
나무가 뽑혔다 29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다 6
지붕의 기와가 날아갔다 3
집이 허물어졌다 2
기와가 날아갔고 집이 허물어졌다 1
집이 허물어지고 나무가 꺾였다 2
집이 흔들렸다 2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렀다 4
곡식이 상했다 5
지나 다지지 못했다 1
83

 

[표 2] 폭풍의 정도

폭풍의 정도
폭 풍 의 정 도 횟 수
폭풍이 있었다 4
우산 자루가 꺾였다 1
나무가 꺾였고 기와가 날아갔다 1
기와가 날아갔고 나무가 뽑혔다 1
가옥이 뽑히고 나무가 꺾였다 1
나무가 뽑혔다 2
나무가 꺾이고 모래가 날아 올랐다 1
황진이 하늘에 차서 사람이 눈을 뜨지 못하였다 1
폭풍우포, 폭풍뇌우포, 폭풍질우 3
15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상태로 바람의 강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 중 나무가 뽑혔다는 것이 가장 많은데 가장 심했던 것은 충해왕 2년(1341)의 일로 대풍으로 소나무 수천 그루가 뽑혔던 일이다.

풍향을 표시한 바람의 이름은 북풍(北風), 간풍(艮風), 건풍(乾風) 등이다. 북풍이 충숙왕 6년(1337)에 크게 일어나 모래와 돌이 날고 눈이 쌓였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아 사람과 말들이 앞으로 가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간(艮)이란 팔괘(八卦)에서 북동 방향이므로 간풍은 북동풍이다. 그 내용을 보면 샛바람이 무릇 5개월이나 불어 백곡(百穀)과 초목이 과반이나 말라죽었고, 지렁이가 길 가운데 나와 죽어 있는 것이 한줌 가량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간풍은 오늘날 말하는 샛바람 또는 녹새풍(祿塞風)에 의한 피해를 의미한다. 그리고 건풍은 건방에서 오는 바람으로 팔괘에서 서북을 뜻하는 것이다.

특별히 찬바람은 한풍(寒風)이라 하였고, 선풍(旋風)에 대해서는 공민왕 12년(1363)에 그 상태를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윤2월 기묘에 선풍이 갑자기 일어나 시고(市賈)의 여러 물건들이 어지럽게 공중 높이 날아 올렸는데 순군(巡軍) 뜰에 떨어지니 사람들이 다투어 이를 주워 가졌다.' 이것은 짐작컨대 오늘날의 국지적 선풍인 토네이도(tornado) 현상으로 보인다.

안개도 종류가 삼국시대보다 매우 다양하다. 무(霧)는 단순한 안개를 나타내며, 가장 많은 것은 대무(大霧)이다. 대무는 간단히 대무라고만 나타낸 것도 있으나 대무의 상태나 기간을 기록한 것도 있다. 대무가 자욱하게 끼었다는 정도의 외에 사람을 구별할 수 없었던 정도의 경우도 있었고, 지척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분간 못할 정도의 상태로서 농도를 알 수 있다.

안개의 종류로는 짙은 안개, 땅안개, 보슬비 같은 몽무, 음무(陰霧) 등 매우 다양하다. 황사현상을 나타내는 황무(黃霧)는 비가 오면 우토 또는 우황토가 된다. 우황토에 관하여 우왕 11년(1385년)에 연주 나루터에 3일간 황토물이 흘렀다는 기록이 있다.

서리는 때아닌 서리가 내려 작물에 해를 준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4월 서리와 7월 서리가 많다. 4월 서리는 늦서리를 뜻하고, 7월 서리는 이른 서리로서 초상(初霜)이 이례적으로 빠르거나 종상(終霜)이 늦은 것으로 모두 기온이 낮은 것을 의미한다. 표 3은 고려시대의 농업상 기상 및 재해발생 종합기록을 표시한 것이다.

 

[표 3] 고려시대의 농업상 기상 및 재해발생 종합기록

고려시대의 농업상 기상 및 재해발생 종합기록
재해 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한 재 - - 3 11 3 3 2 - 3 - - - 2 13 6 - - 1 47
대 수 1 1 2 2 9 12 4 3 2 - - 2 - 1 - - - 1 40
대 풍 1 - - 1 2 - 1 - 1 1 - - - 1 - - - 1 9
한 풍 - - - - - 2 - - - - - - - - - - - - 2
상 해 - - 1 12 1 - - - - - - - - - - 1 - - 15
- - - - - 5 3 2 1 - - - - - - 2 - 1 14
- - - - 1 1 - - - - - - - - - - - - 2
- - - - - 1 - - - - - - - - - - - - 1
박 우 - - - 15 15 2 - 3 - - - - 1 - - - - 1 37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 부근의 홍수에 관해서는 승정원일기 및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해 정종 이후(1400년 이후) 약 450년간의 기록이 있다. 또 조선시대에 실시한 기우(祈雨) 기청(祈晴) 제사의 기록에도 한강 및 서울 시내 수표의 척도를 게재한 것이 있다. 이들 자료를 정리해 보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홍수는 총 176회에 달했다.

가을 말에서 이른 봄에 이르는 반년간의 홍수는 불과 얼마 안되나 늦봄부터 초가을에 이르는 반년간의 홍수는 총 강우량의 90%나 차지하였다. 특히, 7, 8월에는 전체 홍수의 약 70%가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수위가 높았던 해는 태종 갑신 7월 무오(1404년 9월 2일)로 서울 시내에 물이 넘쳐 수심이 10여 척에 달했으며, 영조 무인 갑자(1758년 9월 12일)에 19척, 영조 계미 6월 병신(1758년 7월 20일)에 한강 수위가 20척에 달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컸던 것은 순조 때 일어났다. 순조 임진 6월 계미(1823년 7월 5일)에는 낙동강의 대홍수로 인해 떠내려간 호수가 3,800여 호나 되었고, 64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그 해는 전국적으로 7,671호나 떠내려갔고 압사자가 293명에 달해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전국적인 홍수상황은 증보문헌비고의 우이(雨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태종, 세종, 성종 때의 우토와 같은 특수한 비를 제외하고 중종 이후는 연월, 홍수지역과 그 피해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도별로 정리해 보면 가장 홍수가 빈번했던 곳은 경상도이고, 다음으로 전라도, 황해도, 충청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의 순 이다.

가옥과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매 홍수 때마다 그 수가 기록되어 있다. 역대 왕 중 가장 홍수를 빈번히 겪었던 순조 때는 거의 매년 홍수가 있었으며 그 피해액도 매우 컸다. 특히 순조 15, 16, 17, 19, 20, 21, 22, 23, 24년은 홍수가 매년 계속 발생했다. 피해가 컸던 고종 22년(1885년) 8월의 홍수 때는 전국에 8,600여 호의 재산피해가 있었다.

순조 17년(1817년) 6월의 피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장마비가 여러 달 동안 내렸는데 남쪽 삼도(三道)가 특히 심하였다. 호남지방에서의 피해는 민가 2,453호가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졌으며 사망자는 84명이었다. 그리고 영남에서는 민가파손 2,025호, 사망 45명이었으며 호서지방에서는 민가파손 1,605호, 사망 48명이었다. 또한 평안도에서는 민가파손 145호, 사망 29명이었고 수도 안의 5부에서도 민가가 파손된 것이 778호였다. 왕은 이러한 피해에 대하여 기존에 구제하는 방법 이외에 특별히 더 돌봐 주라고 지시하였다.

헌종 5년(1839년) 8월의 대홍수로 인한 기록을 보면 황해도에서는 평산 등 13개 고을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49명,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민가가 1,835호 였으며, 토산현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50명,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민가가 20여 호였다. 평안도에서는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민가가 1,563호, 사망자는 2명이었으며 경상도에서는 이러한 피해를 입은 민가가 3,108호였고, 사망자는 54명, 함경도에서는 완전히 무너진 민가가 335호, 충청도에서는 피해가구수가 489호, 사망자는 10명이었다.

철종 5년(1854년) 7월의 기록을 보면 네 성문에서 비 개이는 제사를 지냈으며 수원, 김해, 밀양, 양산 등의 고을에서 물에 떠내려갔거나 사태에 깔린 집들을 돌봐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증보문헌비고를 토대로 해서 살펴보면 조선시대 역시 수해 못지 않게 가뭄과 기근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뭄은 한(7회), 대한(28회)으로 구별되어 있고, 기근은 기(55회)와 대기(25회)로 나누어져 있다. 또 황해(1회)와 메뚜기 외의 충해(3회)도 있었고 풍년도 3회나 기록되어 있다.

가뭄과 기근에 대한 개황은 수해에 비해 자세하지 못하다. 다만 어느 지역에 한이 들었고 기가 있었다는 간단한 기술뿐이다. 몇 구절 기술되어 있는 선조 12년(1579년) 함경도의 대한 때는 화묘(禾苗)가 모두 말라죽었다. 선조 17년(1584년) 해주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흙을 파먹었다, 광해군 4년(1612년) 함경도 대기근에는 죽은 사람이 무수했다 등의 기록이 있다.

기근 상황을 물가와 비교가 되어 있는 기록은 드물다. 다만 선조 26년(1593년) 대수로 인한 기근에 목면 1필에 쌀이 2승이었고, 말 1필의 가격이 쌀 34두였다는 것과 선조 29년(1601년) 풍년이 들었을 때의 물건 가격이 비교되어 있다.

기근의 원인을 보면 대부분이 한발에 의한 것이며 특히 초여름과 여름의 강수량 부족이 원인이었다.

가뭄은 한(7회), 대한(28회)으로 구별되어 있고, 기근은 기(55회)와 대기(25회)로 나누어져 있다. 또 황해(1회)와 메뚜기 외의 충해(3회)도 있었고 풍년도 3회나 기록되어 있다.

가뭄과 기근에 대한 개황은 수해에 비해 자세하지 못하다. 다만 어느 지역에 한이 들었고 기가 있었다는 간단한 기술뿐이다. 몇 구절 기술되어 있는 선조 12년(1579년) 함경도의 대한 때는 화묘(禾苗)가 모두 말라죽었다. 선조 17년(1584년) 해주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흙을 파먹었다, 광해군 4년(1612년) 함경도 대기근에는 죽은 사람이 무수했다 등의 기록이 있다.

기근 상황을 물가와 비교가 되어 있는 기록은 드물다. 다만 선조 26년(1593년) 대수로 인한 기근에 목면 1필에 쌀이 2승이었고, 말 1필의 가격이 쌀 34두였다는 것과 선조 29년(1601년) 풍년이 들었을 때의 물건 가격이 비교되어 있다.

기근의 원인을 보면 대부분이 한발에 의한 것이며 특히 초여름과 여름의 강수량 부족이 원인이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재해 중에서 농작물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왔던 재해에 대해서 살펴보면 표 2-5와 같다. 이러한 재해로 인한 빈번한 흉농에 대한 대책으로써 조선시대에도 의창제, 사창제, 진휼청 같은 흉년에 대비하는 저곡(貯穀)제도와 진대(賑貸)제가 있었으며, 흉년의 대용식 조리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구황벽곡방 등의 언해본을 간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구호제도를 살펴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며, 미결로 남겨놓은 소송에 대한 조속한 해결을 지시하고 중앙과 지방에 금주령을 내렸다. 곡물의 씨앗이 부족한 경우에 다른 지방에서 변통해서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도의 긴요한 공물을 제외하고는 적당하게 감해주도록 하였다. 또한 8도에 진휼사 및 종사관을 파견하였다. 또한 각 도의 관찰사에게 창고 곡식의 수량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각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에게 명하여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풀어 도토리를 줍게 하고 미역과 같은 것을 비축하여 구제에 힘쓰게 하였다. 이때에 제의되어 시행하도록 한 흉년구제 방안들 중에서 몇 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각 고을 향교의 생도들 중에서 지원하여

공부하는 사람 이외에는 모두 방학을 하게 했다.

둘째, 흉년구제에는 소금과 장(醬)이 가장 중요하므로

소금 구입하는 수군을 48명에서 100명으로 늘리게 했다.

셋째, 각 포구의 수군으로 하여금 흉년구제 물자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넷째, 내수사에서 장리(長利)로 모아둔 메밀을 민간에 나누어주어

종자를 마련하도록하였다.

조선시대의 농업상 기상 및 재해발생 종합기록

조선시대의 농업상 기상 및 재해발생 종합기록
재해/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춘하
한해 - - 2 19 35 14 13 5 - 1 - - 2 1 2 - - 6 100
대수 - 1 - 2 2 6 13 7 8 2 1 - - - - - - 5 47
대풍 - - - 1 - - 1 - - - - - - - - - - 1 3
상해 - - - 2 1 - - 1 1 - - - - - - - - - 5
- - - 1 5 12 7 5 - - - - - - - - - 3 33
기타해 - - - - 5 2 1 1 - - - - - - - - -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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